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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햇살

오이풀 | 기사입력 2009/11/22 [00:33]

11월 햇살

오이풀 | 입력 : 2009/11/22 [00:33]


온통 다 쏟아져 내리는 대로 맞고 싶은 11월 햇살, 걸러 낼 것도 없고 피할 것도 없고 막을 것도 없다.
 
가을걷이 다 끝난 휑한 바람 부는 논밭에 몸에서 자꾸 떨어내야만 다시 새순 나고 꽃피울 수 있는 빈가지 나무에 그 나무 꼭대기, 모진 겨울바람에도 끄떡없을 새집에 찬란한 여름을 유혹했던 연꽃 지고 드러난 진흙에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누던 빈 의자에도 11월 햇살 쏟아진다.
      

대우아파트 312동 313동 사이 골목길.곧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 아래 모양도 색상도 용도도 제각각 다른 버려진 의자들. 심지어 다리 하나 없는 의자까지 제대로 자기 자리 잡았다. 하나하나 앉아보면 제 구실 하는데 별 손색이 없다. 지나가는 누구나 앉으라 내어 준 의자이니 편안하다. 다리 하나 없는 의자는 몸의 곡선이 아름답고 앉아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11월 정오 전후로는 햇살목욕하기 좋은 곳이다. 대우아파트 지나 갈 일이 있으면 이 사잇길로 지나다 잠시 머무르기를 즐긴다. 
   

대우아파트 장 서는 날, 거동 불편하셔서 보조보행기 밀고 장보러 나오신 백발 할머니.
귤 한 봉지 사서 보행기에 매달고, 무 하나 사서 보행기에 또 매달고, 생새우 사서 보행기에 주렁주렁 매달아서 비탈길 오를 걱정 앞섰다고 하신다. 무 숭덩숭덩 썰어서 생새우 넣어 지져 잡숫고 싶어 편하지 않은 몸 이끌고 나오신 게다. 11월 햇살은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긴 할머니의 어깨에도 축복처럼 쏟아진다. 
  
 

김장농사 거둔 빈자리, 할머니 또 호미 들고 앉으셨다. 내년 초여름 마늘 거두려면 곧 마늘 심어야 하신단다. 끝없는 농사일, 긴 겨울에는 쉬실랑가.
 

11월, 풀은 바람에 누웠다. 풀이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계절은 11월 햇살을 받을 때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11월의 풀빛이다.
 
김수영 시인의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도로변 작은 언덕 동네 할아버지 비닐하우스는 11월 햇살 담은 환한 곳, 일하다가 쉬다가 밥도 해 먹을 수 있는 곳, 늦걷이한 고추도 말리고 콩도 말리고 무청도 말리고 무는 저장하기도 하는 햇살 품은 곳, 정월장 담글 때 쓸 붉은 고추 조롱조롱 곱게 엮어 매달아 놓은 정겨운 곳 , 청포도 즙에 인삼 넣고 만든 막걸리 한 잔 친구에게 대접받은 기분 적당히 좋은 한 낮, 11월 햇살 받으며 한 해 농사 갈무리하기 좋은 곳.
 
11월부는 바람은 햇살이 다 품을 수 있다. 쏟아지는 바람에 낙엽 우수수 내리는 길마저 11월 햇살이 있으니 마냥 걷기에 좋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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