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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김제 찍고 부안!

[종나미의 도보여행] 전라북도 기행을 다녀와서

박종남 편집위원 | 기사입력 2015/04/01 [19:10]

군산·김제 찍고 부안!

[종나미의 도보여행] 전라북도 기행을 다녀와서

박종남 편집위원 | 입력 : 2015/04/01 [19:10]
연일 황사라는 불청객으로 바깥 외출이 꺼려지는 가운데 어김없이 날아든 꽃소식. 웅크렸던 몸을 채 펴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남녘으로 내달렸다.

일단 나서보리라. 마음을 다잡는 가운데 여행의 즐거움이 주어졌다. 근대역사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군산, 너른 들판에 봄기운 완연한 김제, 두 발로 걸으며 자연경관을 즐긴 부안. 이 세 도시를 1박2일로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시간과 일정을 이유로 후다닥 점을 찍고 다닌 여행이라 돌아와서도 아쉬움이 남지만 내 의지대로 가볍게 떠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 위안이 된다.

   
▲ 흐드러지게 핀 매화     © 종나미
 

새벽같이 서둘렀지만 도심을 벗어나는 일에만 한 시간을 할애하고서야 고속도로에 진입이 가능했다. 차장으로 들어 온 아침햇살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니 길 떠나는 실감이 절로 난다. 시원하게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군산에 도착했다. 내게는 완전 초행이었다. 벼르기만 하던 군산 여행이었건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근대역사박물관을 둘러 보고나니 곧 점심시간이 되고 말았다.

차분하게 군산의 근대를 설명해 주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입담에 빠져들었고 동행인 중의 군산 토박이가 구술로 풀어내는 추억여행도 함께했다.

전국 최고 미곡 생산지였던 호남평야 근거리에 있던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미곡수탈의 전진기지가 되어 아픔을 겪어야만했으니 1899년 5월1일에는 군산항의 개항에 따라 해안 중심으로 조계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인 중심의 조계지는 조선인들의 거주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의 주거 모습이 1945년 미군에 의해 촬영되어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1908년에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건립되었다는 서양식 단층 건물인 군산세관 건물은 서울역사(驛舍)와 한국은행 본관과 더불어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는 글을 읽은 적 있어 닫힌 문과 상관없이 사진에 담아야 할 건물이었다.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종나미

▲ 옛 군산세관 건물     © 종나미

▲ 해방 후 군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     © 종나미


군산근대역사벨트에 소개된 장소를 수없이 남겨두고서 김제 망해사로 이동했다. 조용한 사찰. 너른 마당에 오후의 햇살이 가득 찼으나 쓸쓸함을 몰아 온 강바람 앞에 옷을 여미게 된다. 육안으로는 수령을 가늠하기 힘든 팽나무(약 400년이 넘었다고 하는) 두 그루가 바람 앞에서 여린 가지들을 부여잡고 의연하게 손님을 맞는다.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은 망해사에서는 나의 걸음조차도 소음이 되고 만다. 해우소에는 선암사를 떠 올리게 만드는 조망 창이 있었다. 진입로에 열을 지어 선 벚나무. 아직 꽃망울을 틔우지 못한 벚나무는 곧 탐스런 꽃송이로 치장하여 찾는 이를 반기겠다 싶어 완연한 봄날 산책을 기대하게 했다.

망해사 주변 산책로에 도보길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김제에도 ‘새만금 바람길’이라는 이름의 도보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내가 사랑하는 도시, 시흥시의 도보길인 늠내길 4코스 ‘바람길’과 동명이라니, 이름에 반가웠다.

    
▲ 봄 햇살 가득한 고즈넉한 망해사의 오후     © 종나미
▲ 새만금 바람길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종나미

▲ 새만금 바람길에서 바라 본 김제의 한적한 마을     © 종나미


해안로를 따라 달리는 차장 밖으로 바닷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와 보는 부안이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적벽강부터 ‘마실길’을 걷기로 했다. 걷기를 다소 싫어하는 동행인도 온기가 사라진 바람 부는 해안에 기꺼이 나선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만조가 된 바다는 파도로 화답했고 아쉬움에 해는 쉬 넘어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게으름을 떨고 있었다. 해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수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수성당은 서해바다를 다스리는 개양할머니와 그녀의 딸 여덟 자매를 모시는 제당으로 마을에서 주민들이 매년 제를 올리기도 하고 개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기도 한다. 때 마침 일산에서 왔다는 아녀자들이 제를 올리기 위해 과일과 고기들을 차리고 있었다.

바다마을 뒤로 후박나무 군락지를 돌아 모두들 채석강까지 걸었다. 여전히 해는 하늘에 걸려 있었고 수평선은 가슴을 풀어 헤치고 애타게 해를 부르고 있었다.

횟집 담벼락까지 찰랑이는 파도 때문에 채석강 구경을 포기하고 모래밭에서 2015년 3월 26일의 태양, 그 마지막을 마주했다. 부안에서의 하룻밤. 깔끔한 숙소와 맛난 음식들로 하루의 피로를 덜어냈다. 

▲ 수성당과 기도처     © 종나미

▲ 해안마을 뒷편 후박나무 군락지     © 종나미

▲ 채석강에서 바라 본 노을     © 종나미


▲ 아리랑 문학관     © 종나미


이튿날, 김제 벽골제와 아리랑 문학관을 들렀다.

조정래의 작품이, 읽고 나서 진한 여운이 남는 그의 글이, 사전에 얼마나 지난하고 열정적으로 준비되어 써졌는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갔다.

국사 시간이면 일단 외우기부터 했던 김제 벽골제, 농업시설이라는 것 외에 아는 바가 없이 제천 의림지와 함께 외우고 또 외웠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는 당연히 적어도 저수지 정도의 시설은 남아있으리라 생각했다. 대형 대나무 조형물인 두 마리 용을 경이로움으로 감상하고 그 아래에서 제방을 쳐다 볼 때 까지 쭉. 제방에 올라서니 메마른 수로가 보였다. 하천의 기능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시멘트 옹벽으로 물을 대는 통로만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실망이 컸다. 일직선 제방으로 다 막힌 그곳에는 수문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는데 주변에 복원해 놓은 석축도 이질감이 절로 느껴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당시에 엄연히 백제,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인공적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던 당시의 토목기술이 과학기술사에서 획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벽골제, 보이는 것이 없으니 신뢰도가 턱없이 바닥이지만 역사적 의미를 키워본다.


▲ 대나무 조형물     ©종나미

▲ 대나무 조형물     ©종나미

정오를 지나 시래기 밥과 국으로 맛난 점심을 해결하고 나니 나른해지는 오후다. 차량들이 꼬리를 물기 전에 서둘러야 했지만 올라오는 길에 새조개 축제가 막 막을 내린 남당항에 들렀다. 새조개 가격은 축제에 비해 많이 내렸다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한적한 상가 주변에서 할 일 없이 노니는 원주민처럼 어슬렁거리며 돌고 또, 돌았다.

소량의 새조개를 구입하여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는 좀 전과 달리 차들이 늘어 결국에는 지체 구간을 만들었다. 익숙한 우리 동네로 들어서니 1박2일의 여정이 급 피로를 불러왔다. 아쉬움이 많이 남은 여행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리라 맘먹는다. 특히, 군산을 가야겠다. 조만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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