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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던져 신념 지킨 '절의'에 가슴 뭉클

프란치스코 교황 미사장소 해미읍성 가보니…“문 닫은 거 아냐?”

이민선 기자 | 기사입력 2014/08/13 [02:58]

목숨 던져 신념 지킨 '절의'에 가슴 뭉클

프란치스코 교황 미사장소 해미읍성 가보니…“문 닫은 거 아냐?”

이민선 기자 | 입력 : 2014/08/13 [02:58]
▲ 교황을 맞이하기 위해 공사중인 해미읍성 정문(남문), 도로 보수 공사도 한창이었다.     © 이민선


‘하필 이런 때 올게 뭐람’…후회막급, 핸들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일단 차에서 내렸다. 아내와 아이들 얼굴에도 실망스런 기색이 또렷했다.

“이게 뭐야 아빠, 여기 완전 공사장이잖아” 

열일곱 딸아이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열 살 아들 녀석이 무척 흥미로워 한다는 것인데, 끝가지 듣고 보니 녀석 말에도 역시 가시가 있었다. 

“와 아빠 저거 다 뭐야? 이상하게 생긴 차 엄청 많아, 포크레인 같기도 하고, 불도저 같기도 한데…근데 아빠 저거 보여주려고 여기 데려온 거야?”

아내는 차분한 말투로“아예 입구까지 막아 놓았네, 오늘 여기 문 닫은 거 아냐?”라고 의논하듯 물었는데, 내 귀에는 이 말도 빈정거림으로 들렸다.

강원도에 있는 00해수욕장을 가자는 가족들 의견을 묵살하고 박박 우겨서 ‘해미읍성’에 온 터였다. 아이들 역사공부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들이 댔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사람 득실대는 해수욕장이 영 내키지 않았고, 오래 전부터 ‘해미읍성’을 꼭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은 이제 딱 하나. 공사 중이라도 관광은 할 수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빨리 확인시켜 주는 길 뿐이었다. 해서, ‘그르릉…쿵쾅…끽…타다다닥…’소리로 요란한 정문(남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 여기로는 안 돼요, 동문하고 서문은 열려 있으니까 그리로 가세요”

안전모를 쓴 남자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말한 동문과 서문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 것 같아 ‘좀 들어갑시다’하고 따지듯 말하자,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그는“5분만 걸으면 됩니다”라며 빙그레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더 따지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관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소득은 있는 셈이었다. 


교황을 맞이하기 위해 ‘꽃단장’ 중인 해미읍성 

▲ 객사에 가면 관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할 수도 있다. 왼편 여학생이 입은 옷은 포졸관복, 오른편 어린이가 입은 옷은 왕이나 세자가 입던 옷이다.     © 이민선

  
해미읍성을 방문한 것은 지난 8월4일이다. 해미읍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이하기 위해 한창 ‘꽃단장’중이었다. 

방한 나흘째인 17일, 교황은 서산 해미 순교성지에서 아시아 주교들과 만나고 해미읍성에서 아시아・한국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기로 예약 돼 있었다. 교황의 폐막미사는 미국 CNN 등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된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해미읍성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약 100년간, 천주교 신자 수천여명이 처형된 내포지역 최대 천주교 순교 성지다. 내포지역은 충남 서북부를 통칭하는 지명이다. 보령·서산·홍성·예산·태안·당진 등 955㎢에 이르는 곳이 내포지역에 속한다.

당시 해미 읍성에는 내포 지방에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항상 가득했다고한다. 이곳에서 군졸들은 매일같이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으로 끌어내 교수, 참수, 몰매질, 동사형, 생매장형 등으로 죽였다. 심지어는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을 고안해서 죽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

내포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이유는, 내포지역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제들은 바닷길을 따라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 지역에 천주교 교리를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한 신자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백성들이다. 사대부들은 충청감사가 있는 공주나 홍주 진영으로 이송됐고 서민들은 해미읍성으로 이송 돼 처형됐다. 김대건 신부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했다. 

서문 근처에 순교탑과 함께 신자들을 자리개질해서 죽이는데 사용된 돌다리가 보존 돼 있었다. 전시 된 자리갯돌은 모조품이었다. 진품은 2009년 1월에 해미순교성지로 옮겨갔다고 한다. 보기 좋게 반듯한 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 졌을 광경을 상상하니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돌았다. 

서문은 박해시대에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여겼던 자리다. 부정한 것은 서문으로 내어다 버리는 미신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도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처형했다고 한다. 폐막 미사 때 교황이 바로 이 서문 옆에 자리 하기로 예정 돼 있다. 


▲ 서문 밖에 있는 자리갯돌과 순교비. 관군 몇명이 신자들 몸을 들어서 이 돌에 메어치면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 이민선

 
읍성 중앙에는 300살 먹은 호야나무(서산 사투리, 회화나무)가 있다. 천주교 박해 역사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나무다. 이 나무 동쪽 가지에 철사 줄을 매달아 수많은 신자들을 고문하고 목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신자들을 매달았다는 동쪽에 있는 가지는 1940년대에 훼손되어 옹이만 남아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옹이 주변으로 녹슨 철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호야나무 

해미읍성은 이렇듯 천주교 박해 성지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오롯이 천주교 박해 역사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성곽과 함께 조선시대 관청과 감옥(옥사), 객사 그리고 무기 등도 전시돼 있다. 

활터에 가면 친절한 활터지기 설명을 들으며 활을 쏠 수 있고, 객사에 가면 관복을 입고 잠시 조선시대 관리가 될 수도 있다. 다듬이질, 짚풀공예, 왕골공연, 삼베짜기 장면을 볼 수 있고, 투호놀이, 윷놀이, 제기차기, 굴렁쇠 굴리기 등의 민속놀이체험 할 수 있다.

정문으로 사용되는 남문 주변에는 각종 무기가 전시 돼 있다. 15세기 최고 첨단 과학 무기인 ‘신기전’ 과 고려시대부터 사용됐다는 ‘대장군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별대완구’와 ‘화포’, 성을 공격할 때 활용됐던 ‘운제’ 등이 전시돼 있다. 운제는 일종의 사다리차로, 사다리가 구름에 닿을 듯 하다하여 ‘운제’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을 둘러쌓은 성이란 뜻으로, 평상시에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고 전시에는 방어 기지가 되는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미읍성에는 ‘진짜 민가’가가 없다. 민가를 복원시켜 놓긴 했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없으니 ‘진짜 민가’라고 볼 수는 없었다. 


▲ 15세기 무렵 최첨단 과학 무기인 '신기전', 이 무기를 주제로 한 영화가 제작 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이민선


해미읍성에도 본래 민가와 학교가 있었다. 보존공사를 시작하면서 모두 철거했다고 한다. 해서, 성안에서 숙박을 할 수가 없다. 숙박을 하려면 주변에 있는 모텔 등을 이용해야 한다. 초가집에서 숙박을 하는 낙안읍성(전남순천)과 다른 점이다. 낙안읍성은 우리나라 3대 읍성(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중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다.

해미읍성은 서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에 걸쳐서 쌓았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이 1579년(선조 12)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약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성내 면적 203,592㎡로 낙안읍성(22만3108㎡)보다 약간 좁고 고창읍성(18만 9,764㎡)보다 약간 넓다.

때가 때이니 만큼 해미읍성 사람들 관심은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에 맞춰져 있었다. 활터지기에게 쓸 만한 숙소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이미 다 예약 끝났을 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놀란 눈으로 “이렇게 한산 한데, 주말도 아니고요” 하자 “그래도 이미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이 다 끝났을 거예요, 그 날(교황 방문하는 날)엔 아마 이 부근에 텐트촌이 생길 수도 있고요”라고 말했다. 활터 지기는 교황이 오는 날 숙박 할 수 있는 곳을 묻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해미읍성 어디에도 이제 더 이상 피 냄새는 나지 않지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 천 명을 학살한 잔인한 역사는 곳곳에 배어있었다. 이 잔인한 역사의 아픔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사로 모두 씻겨 나가길 바라며 해미읍성과 작별을 고했다. 

신자들은 ‘배교’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가족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말을 하지 않고 끝가지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 ‘순교자’란 이름으로 해미읍성에 남아 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던 그들의 절의(節義)가 여행자의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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